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 가락동-방이동 고분군 (문단 편집) == 축조 주체의 문제 == 방이동 고분군의 여러 고분들은 다른 [[공주시|공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송산리 고분군]]이나 [[부여군|부여]] [[능산리 고분군]], [[경주시|경주]] [[대릉원]]과 같은 화려한 왕족의 고분들에 비해서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물론 잔디깔린 무덤이라는 점은 한결같이 같지만 대중적인 관심을 이끌만한 유물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대부분 [[후장]]을 하지 않는 석실이라 부장품이 많이 없고, 석실이다보니 [[도굴]]이 용이하여 이미 역사시대를 거치며 다 털린 지 오래고 현대에 출토된 유물이 소량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성기 백제 석실의 자료가 비교적 영성한 탓에 신라와 구분되는 석실의 특징[* 특히나 당대의 사람들이 “우리는 신라 소속이니깐 신라스럽게 무덤을 만들자”라는 식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축조 주체와 사용주체 등을 판별하는 것은 관심을 갖는 각계 연구자들의 몫이기도 하다.]을 쉽게 찾기 어려우며, 석실의 특징상 도굴이 쉽기 때문에 연대를 특정할만한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석실의 축조 주체에 대한 판별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방이동 고분군이 백제 고고학에 관하여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일찍이 백제 고분 문화의 전개 과정을 방이동 고분군과 가락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가 백제라는 것에 대한 찬성론과 부정론 이 나뉜 상태에서 이후 웅진기, 사비기 백제에 대한 [[역사고고학|역사고고학적]] 연구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와 관련된 논의는 여전히 주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방이동 고분군이 일견 유적 자체만 볼 때는 별 볼 일 없는 유적일 수 있지만 연결된 여러 분석들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축조 주체의 문제는 현재에 접어들어서는 백제 고분군이냐 신라(또는 고구려 혼재)의 고분군이냐의 문제로까지 세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기존에는 거의 다 백제의 것 또는 신라의 것으로 보다가 현재 학계에서는 가락동 고분군까지 포함하여 가락동 3호는 백제, 방이동 5호의 수혈식 석곽은 신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다만 세부적으로 논자마다의 개별 고분마다의 설정이 다소간 차이가 있다. 나아가 논의 자체가 백제냐 신라냐를 넘어서 석촌동 고분군과 가락동 서쪽의 일부 고분군이 백제의 고분군이고 방이동 고분군이 신라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고분군이라는 설과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 전체가 원래 백제의 고분군이지만 신라인들이 이를 일부 재사용하면서 신라 고분군'처럼' 보이게 한다는 견해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나아가 석실 재사용론을 인정하면서도 백제 고분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이하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를 백제로 보는 측을 '''인정론''',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여러 세력이 축조 주체로 관여한 결과로 보는 측을 '''부정론'''으로 구분한다. 다만 인정론/부정론으로 구분하더라도 세부적인 견해는 인정과 부정이라는 각각의 큰 틀 속에서 논자마다의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주요한 견해만 서술하는 것으로 한다. 또한 특정한 주장과 반론, 재반론 등은 아직 완전히 인정받는다고 할만한 결론이 도출된 것이 아니므로 각 입장에서의 주장을 소개하는 형태로 서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